산상수훈의 열 가지 가르침
1. 팔복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마5:1-12). 예수님 믿고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으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물적 외적 현실적 복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주님은 물적 외적 현실의 복도 백 배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막10:29-31).
2. 온전은 마음을 위에 두는 것입니다(마5:17-47). 대적자가 오리를 가라하면 십리를 가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5:48).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 온전은 마음을 위 두는 것입니다.
3. 빛과 소금은 마음에 영광을 가지는 것입니다(마5:13-16.참고/행7:2). 소금의 맛은 향기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은 하나님에게 올려드린 제물의 향기입니다(엡5:2).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빛이시고, 그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영광을 가지면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참고/행7:2).
4.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가지는 것입니다(마6:1-18). 은밀히 행하는 구제, 금식, 기도의 영성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임재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성 ① 구제(선행=은사, 재능, 봉사)를 은밀히 행할 때,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가(행9:40) / 영성 ② 금식을 은밀히 행할 때, 무엇보다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삶 / 영성 ③ 기도를 은밀히 행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통회 자복 회개의 기도, 중언부언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기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온몸이 감격에 사로잡히는 기도를, 올리는 자에게, 주님이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십니다.
5. 보물은 마음에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마6:19-24).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돈이 신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다가, 좀(사고), 동록(질병), 도둑(재난)으로 지출되지 않으려면, 성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수입으로 부음받게 됩니다. 눈이 어두우면 돈이 주입니다. 눈이 밝으면 돈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도 여러분의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다스려 주십니다.
6. 먼저는 마음에 신뢰를 가지는 것입니다(마6:25-34).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께서 먹이고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염려를 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신,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할 것이요’를 얻게 됩니다(신28:12).
7. 열매는 마음에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마7:15-23). 거짓선지자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 나무로 양을 해치고 노략합니다. 선한목자를 따르는 선한선지자는 좋은 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양을 살립니다. 하나님께 드릴 첫 번재 열매는 영혼입니다. 마음에 영혼을 품고 전도하여 구원받고 영생 얻게 하는 영적 해산을 감당해야 합니다.
8. 간청은 마음에 선의를 가지는 것입니다(마7:7-17). 벗을 위해 한밤중 절친을 찾아가 떡 세 덩이를 구했습니다(눅11:5-8). 선의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자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단1:8,6:7-10). 하나님의 뜻인 선의를 갖고 간청할 때,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 약속을 받게 됩니다.
9. 비판은 마음에 긍휼을 가지는 것입니다(마7:1-6,12). 함께 거룩한 자녀된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엡4:32), 성도를 긍휼히 여기고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10. 순종은 마음에 생명을 가지는 것입니다(마7:13-14,24-27). 산상수훈의 주옥 같은 말씀에 듣고 ‘행하는 자’, 순종을 명하십니다. 하나님 말씀 순종을 위해 날마다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참고/대하6:13;단1:8,6:7-10). 말씀 순종으로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의 유혹을 이기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천국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산상수훈 첫 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임을 새겨야 합니다. 종국이 천국인 인생이 가장 복있는 자입니다. 순종은 마지막까지 간직해야 할 천국가는 생명을 잃지 않게 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5:10-12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4살부터 살기 시작하여 성년이 될 때까지 보냈던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 납달리, 거버나움 동네가 있는 갈릴리를 중심 무대로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마4:13,23). 갈릴리호수의 북쪽 막달라에서 가버나움쪽으로 약 1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갈릴리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이 있습니다. 지금은 팔복산Mount of Beatitudes으로 불리는 이 ‘산에 올라가 앉으신’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에게 ‘입을 열어 가르쳐’ 전하셨습니다(1-2). 이를 산상수훈山上垂訓,the Sermon on the Mount 또는 산상보훈山上寶訓 그리고 예수님이 산에서 하신 설교라고 해서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도 부릅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이 말씀은 ‘기독교의 대헌장’ 또는 ‘기독교 윤리의 근본’이라고 불리는 주옥같은 말씀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팔복Beatitudes: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
산상수훈의 첫 번째 말씀은 팔복Beatitudes입니다. 말 그대로 여덟 가지의 복입니다. 이로 인해 주님이 말씀을 전하신 산을 팔복산이란 별칭으로 부릅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3-12)
관심있게 보신 분들은 복이 8개가 아니라 9개인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9번째 복도 ‘의를 위하여’로 시작되는 복과 연결되기에 통칭 팔복이라 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은 당시 유대인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복과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동안 율법에 명시된 복 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10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12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28:3-13)
율법에 명시된 구약적 개념의 복이 물적이고 외적이고 현실적이라면, 신약적인 주님의 복은 영적이고 내적이고 이상적理想的ideal 복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적으로 구약 신명기에 기록된 복을 얻고 싶지, 신약 마태복음의 복은 지금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명기에 기록된 복을 주시기 전에 전제하신 것이 있습니다.
“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13…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3,13-14.참고/레 26:3-13;신 7:12-24).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면’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15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16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신28:15-19). 그러므로 하나님 명령과 규례를 떠난 물적 외적 현실적 복들은 저주가 되어, 개인과 가정과 사회에 화로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모든 명령과 규례’는 율법입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선을 말씀합니다(롬7:12).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롬10:5.참고/레18:5).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롬3:20).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 앞에 인간은 죄인임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는 율법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갈3:10.참고/신27:26). 그러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해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롬7:7).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지만, 율법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 진 것이라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갈3:19). 율법은 약속된 분이 오시까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하였습니다(롬3:21). 율법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율법과 동일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2-24).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하였습니다(갈3:1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마태복음 5장 21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33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38절 ‘너희가 들었으나’ 43절 ‘너희가 들었으나’.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들었으나’ 는 구약의 율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 앞에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속으로 율법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들이 하나님이 선포하신 ‘모든 명령과 규례’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모든 복을 받으려면, 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물적이고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과 관계 없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 내 안에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으로 내 마음이 하늘나라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가진 것이 여유롭지 못해 눈물을 삼킬 때도 있지만 주님의 위로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약삭빠르지 못해 뒤처지는 것 같지만 주님의 인도를 믿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맛난 음식, 좋은 여행, 기쁜 나날이 아니어도 주님이면 만족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풍족하지 않아도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을 때 주님의 돌보심을 확신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욕심을 버리고 비워 주님의 일하심을 붙들게 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서로의 이해를 위해 노력할 때 주님의 자녀임을 인정받게 됩니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0-12). 복음을 위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 앞에서도, 하늘에서 면류관을 준비해 주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적이고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과 관계 없이 나를 믿는 너희는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질이 있을 때는 좋지만 없을 때는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물질이 없을지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외적 자랑이 있을 때는 좋지만 없을 때는 마음이 허무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외적 자랑이 없을지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도 뜻대로 될 때는 좋지만 현실의 장벽에 막히면 마음에 자괴감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현실에서 뜻대로 되지 않아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 믿는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팔복입니다. 육체가 마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육체를 이끕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님께로 나가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물적 외적 현실의 복도 예수님이 주실 줄 믿습니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막10:29-30.참고/마19:27-29;눅18:28-30). 산상수훈 첫 번째 가르침 팔복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입니다. 중심입니다. 왕입니다. 예수님으로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물적 외적 현실의 복도 반드시 주신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온전 : 마음을 위에 두는 것
예수님은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17-18). 이제는 율법의 가르침이 아니요. 율법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리라’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을 거역하면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19-20).
예수님은 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1-22). ‘엣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21). 구약의 율법에는 사람의 목숨을 해한자는 형벌을 받게 될 것리라고 하였지만, 신약의 복음은 ‘형제에게 노’를 발하고, ‘라가라’ 돌대가리야 비하하고, ‘미련한 놈이라’하여도 심판받고 공회에 잡혀가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22). 이러한 언사는 사람의 육체를 해하는 것이 아니기에 형사 처벌을 받지 않지만, 상대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기에 자칫 그 사람이 격한 행동이나 극한 선택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또한 살인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우리는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23그러므로 예물(예배)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3-26).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먼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배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23). 또한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 노중에라도 빨리 화해해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주어서,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25-26). 이것은 사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있기 전 노를 발하지 말라, 원망살 일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19:9;막10:11-12;눅16:18.참고/출20:14;신 5:18).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7-28).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는 구약의 율법입니다(27).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28). 신약의 복음입니다. ‘음욕’을 품지 않는 또는 품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또한 주님은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간음’이 드러난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31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31). 구약 율법에는 아내가 수치되는 일을 하면 이혼증서를 써주어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였습니다(신24:1-4). 그런데 ‘수치되는 일’을 가부장적 입장에서 적용 집에 살림만 잘못해도 쫓아 버렸습니다. 그것은 남자들이 마음껏 아내를 바꾸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32).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하였는데요(32), 이것은 이혼을 하고 난 후 재혼을 했다가 삼혼을 하고 다시 첫 번째 혼인했던 아내와 결혼은 간음이라고 하였는데, 첫 번째 혼인했던 아내가 자신과 이혼한 후, 다른 남자와 재혼을 했는데 다시 결합하는 것은 간음이라는 것입니다(32). 이혼을 남용하는 것은 정욕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혼이 사유로 정한 간음에 대해서도, 율법에 ‘이혼 증서’를 써주도록 한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막10:4-5). ‘완악’한 인간이 정욕으로 이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간음을 이혼의 라인으로 한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 각이 하나님 앞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이 또한 정욕이 없는 또는 정욕을 품어 보지 못한 사람이 없기에 자신의 이혼에 대해서도 신중해야 하고, 타인의 이혼에 대해서도, 돌을 던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허물이고 깨어지는 존재임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져 그가 실족하게 되었다면, “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29-30).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있기 전 타인의 간음을 보지 말고 자신의 음욕을 보고 겸허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33-37).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시면서(참고/레19:12;민 30:2;신 23:21),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3). 신약의 복음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라면서,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34). 우리가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맹세가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땅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까?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35). 이 지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35). 그 이유는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35). 옛날에 우리나라는 한양에 누가 산다고 하였습니까? 상감마마가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로 믿었습니다. ‘큰 임금의 성’이 그 뜻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지구안 어느 곳에서 맹세를 하는 것은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에게입니다(참고/출20:7;레19:12;민30:2).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맹세는 물론 인간 사이 맹세도 하나님이 듣고 계신 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36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6-37).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라고 하십니다. 네가 알고 있는 것만 답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나친 것에 빠지지 말라, 유혹받아 넘어가 맹세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참고/눅6:29-30).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8-42).
구약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했지만(38), 신약 복음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39).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39-42). 주님은 우리에게 내키지 않는 대적에게라도 내어 줄 수 있는 강건한 속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엡3:16.참고/롬7:22;고후4:16).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참고/눅6:27-28,32-36).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3-47).
구약 율법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였지만(43), 신약의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하십니다(43-47). 주님은 우리에게 이방인, 세리로 상징할 수 있는 세상의 따름을 따르지 말고, 소외를 당해도 하늘의 따름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의 가르침. 상대에게 노를 발하지 않아 격한 행동이나 극한 선택을 하지 않게 하고, 고소인과 화해하여 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 타인의 간음을 보지 말고 겸허히 자신의 음욕을 보는 것, 지나친 유혹에 빠져 맹세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 대적자가 오리를 가라면 십리를 가는 대적에게라도 내어 줄 수 있는 강건한 속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것. 우리가 이방인, 세리로 상징할 수 있는 세상의 따름을 따르지 말고, 소외를 당해도 하늘의 따름을 따르라는 것. 그와 같이 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48). 산상수훈의 두 번째 말씀은 온전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온전은 마음을 위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에서 온전한 선물을 내리워 주실 줄 믿습니다.
빛과 소금 : 마음에 영광이 있는 것
산상수훈 세 번째 가르침은 빛과 소금입니다. 예수님은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3-15.참고/막9:50;눅14:34-35).
소금은 맛을 내고 빛은 밝음을 냅니다. 맛은 향기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하나님에게 올려드린 제물의 향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말씀하십니다(고후2:5). 예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라(요일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행26:23). 우리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맛, 향기와 그리스도의 빛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마음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사43:2).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 찬송, 영광입니다. 창조자의 피조물인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영광이 있을 때, 누구 앞에서도 빛과 소금이 될 줄 믿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마음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명은 받은 아브라함은 순종한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창12:1). 그런데 이 언약이라는 것이 굉장히 관념적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현실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추상적인 내용들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과 아내 사래 그리고 조카 롯까지 달랑 세 명의 가족이 떠났는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어야 되는데, 전혀 접근성이 떨어지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신을 포함 세 명의 단출한 식구를 데리고 떠나면서도,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 즉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이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다고 하였습니다(행7:2). 갈대아 우르, 메소보다미아는 문명이 발달하고 산업이 번성하여 우상이 창궐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영화가 가득한 곳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고향 갈대 우르에서 68년 그리고 중간 기착지였던 하란에서 7년을 살면서, 화려한 세상의 영화를 보았지만, 아브라함이 본 하나님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단 세 명이서 출발했지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에 가진 아브라함이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창12:3). 이에 대해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갈3:8). ‘땅의 모든 족속’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 모두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뜻 “열국의 아버지” 모든 자들의 아버지입니다(창17:5).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창17:6). 아브라함은 한 사람인데 그를 조상으로 믿는 이들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 언약의 아들 이삭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아랍인들은 아브라함의 첫 번째 아들이 이스마엘의 자손으로 자신들이 적통이라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입니다(롬4:16). 이렇게 아브라함을 통해 번성한 민족과 나라들이 세계에 가득합니다. 왕들도 모두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향력이 빛과 소금입니다. 그럴 수 있는데에는 아브라함에게는 메소보다미아 찬란한 영광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마음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산상수훈 첫 번째 가르침 팔복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입니다. 중심입니다. 왕입니다. 예수님으로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물적 외적 현실의 복도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산상수훈의 두 번째 가르침은 온전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온전은 마음을 위 두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세 번째 가르침은 빛과 소금입니다. 소금의 맛은 향기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을 하나님에게 올려드린 제물의 향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빛이시고 그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 찬송, 영광입니다(사43:2).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마음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 역사, 응답, 능력, 복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이 세상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마음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산상수훈의 첫 번째 말씀 팔복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입니다. 중심입니다. 왕입니다. 예수님으로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물적 외적 현실의 복도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내세에 영생과 현세에서도 약속하신 백 배의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두 번째 말씀 온전은 마음을 위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의 가르침. 노를 발하지 않아 상대가 극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는 것, 겸허히 자신의 음욕을 보는 것, 지나친 유혹에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게하는 것, 대적자가 오리를 가라면 십리를 가는 대적에게라도 내어 줄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것. 세상의 따름을 따르지 말고, 소외를 당해도 하늘의 따름을 따르라는 것.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가르침 때문입니다. 마음을 위에 두게 하옵시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셨사오니, 우리에게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내리어 주옵소서.
세 번째 말씀 빛과 소금은 마음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인 찬송, 영광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마음에 영광이 있게 하시고, 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 역사, 응답, 능력, 복을 나타내 주시옵소, 그것이 세상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6:30
영성:마음에 임재를 가져라
산상수훈 네 번째 말씀은 구제와 금식과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영성으로 통칭할 수 있습니다.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
영성 1. 구제에 대하여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1-4).
도르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제자로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예수님도 불쌍히 여기셨으며, 초대교회도 행하였던 것과 같이 어려운 과부들을 돕는 데 힘썼습니다(행9:39.참고/출22:22;신10:18;눅7:13;행6:1;갈2:10;엡2:10;딤전5:3). 힘썻는데 선행과 구제를 보통 정도가 아니고, 심히 많이 한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많이 한 도르가가 그만 중한 병에 죽게 되었고, 이미 그의 유해는 장례절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행9:37). 도르가가 이미 죽었음에도, 그녀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던 제자들은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행9:38). 너무나도 도르가를 사랑했고 존경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욥바로 와 줄 것을 간청하게 됩니다(행9:38). 룻다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18km가량으로 멀지 않은 길입니다. 찾아온 두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알게 된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룻다에서 욥바로 올라가게 됩니다(행9:39).
베드로를 맞이한 제자들은 죽은 도르가를 누인 다락방으로 안내하였고, 많은 과부가 도르가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가 생전에 만들어준 자신들의 속옷과 겉옷을 내보이면서, 애통해했습니다(행9:39).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행9:40). 그리고는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소리쳤습니다(행9:40).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도르가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 것입니다. 도르가에게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고 하였습니다(행9:41-42).
도르가의 구제는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많은 선행과 구제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여제자’라고 하였습니다(행9:30). 이는 도르가가 신실한 주님의 자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한 그녀의 구제는, 본문의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에 합한 여인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베다니 동네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말씀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고, 주님은 이 가정에 종종 들려 고된 사역에 쉼을 가지시고 지극한 정성으로 준비해준 별미를 시고 귀한 말씀을 전하시기도 하셨습니다(요11:3;눅10:30).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이르시니’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12:1-3). 이때 발끈하며 일어선 자가 있었는데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로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며, 마리아에게 호통을 쳤습니다(요11:4-5).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부은 향유는 처녀가 결혼 첫날밤 신랑을 맞이할 때, 몸에 봇는 것으로 신혼 용품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 가격이 장정 3000명 하루 품삯인 ‘삼백데나리온’으로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그 향유를 부은 것은 앞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었는데, 이를 모른 가룟 유다는 그것을 팔면 많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참고/막14:8). 그러나 그자의 말은 본문에 기록된 ‘외식’ 즉 위선일 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하였습니다(요11:6). 만약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지 않고, 회계인 자신에게 맡겼다면, 향유를 팔아 10/1이던 3/1이던 착복을 할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구제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는 자입니다(1).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1). 마치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신 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2).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선행과 구제를 홍보하여 그것으로 상장을 받고 이력에 남겨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그자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기에 하나님 앞에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지칭된 안상홍 증인회에서 이름을 바꾼 세계복음화협의회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로 약칭하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선행으로 영국의 국왕과 미국 대통령의 상을 받았다고 홍보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선행을 한다고 그 집단이 진리일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엡2:8-9).
하나님을 섬기는 여제자 도르가는 하나님 은혜 안에서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제자들이 롯다에 있는 베드로를 욥바까지 청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행9:41-42)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1).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입니다(4). 하나님 은혜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아름다운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0:42).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히11:6).
그러나 가룟 유다 같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께 드린 예물을 담당한 회계를 맡으면서, 그중에 구제할 때 마치 자신이 베푸는 것처럼 떠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둑’이라고 지칭되었듯이 구제비 가운데 착복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스승까지 은 삼십에 파는 자가 되었습니다(마26:15). 구제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행하는 의는 자칫 악으로 변질 되고, ‘자기 상’을 받는데 집착하다간 자칫 ‘자기 화’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신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행과 구제를 행할 때,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구제는 선행임으로 구제 하나만 아니라, 여러분의 은사, 재능, 봉사 등 모든 것이 선행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 재능, 봉사 등 또한 은밀히 행할 때 은밀히 보시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금식을 은밀하게 하라
영성 2. 금식에 대하여.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16-17).
예수님은 금식도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의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기색을 보이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습니다.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으면, 사람들에게는 금식하는 자로 보이지 않지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은밀한 금식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게 하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금식할 때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는데요. 금식하면 마음의 얼굴인 영혼이 맑아집니다.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묻자,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막2:18-20).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신랑이 있을 동안이란 문자적 의미는 당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때는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육체로 함께하시지 못하지만,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의 증인으로 주님 전파할 수 있도록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잊지 않도록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주님이 떠나지 않게, 주님의 버림을 받지 않는 자가 되도록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과 같은 절박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은밀한 금식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셨습니다(사58:6). 은밀한 기도로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자는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14-15). 은밀히 금식하고도 금식과 같은 절박한 신앙을 가지고도, 사람과 풀지 못하면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심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풀어지는 것이 은밀한 기도이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님이 항상 거하고, 일하고, 이끄심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은밀한 금식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
영성 2. 기도에 대하여,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5-5).
기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은밀하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외식으로 기도하는 자란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백성의 존경은 받는 바리새인도, 백성의 멸시를 받는 세리도 성전에 올라갔습니다(눅18:10). ’세리는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통회 자복 회개하였습니다(눅18:13). 그러나 ‘바리새인은 서서 (세리와) 따로 기도하여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며 기도했습니다(눅18:11).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 믿’는 자로서, 자기 같은 의로운 자의 기도만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눅18:9). 그러나 예수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18:14). 바리새인은 자기같이 의로운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다며, 자랑하듯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바로 외식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거룩하다고, 찬사를 받으며,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 같이 성전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통회 자복 회개가 은밀히 기도하는 자요. 그 기도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7-8)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들이 같은 내용의 기도를 계속, 중언부언 되풀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으셨다는 믿음이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기도의 상대가 자신의 기도를 확실히 들었다고 생각하면 중언부언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목석이나 쇠붙이 우상을 놓고 기도하기에 계속 동일한 내용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기도를 들었다는 표시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의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심의 토대 위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중언부언의 기도는 소망을 날마다 기도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증언부언이란 하나님께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반복하여 아뢰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정을 모르실 것이라는 의심입니다. 그러나 소망을 날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듣고 계심과 하나님의 정한 때 응답을 믿음입니다. 아무리 중언부언해도 의심의 토대 위에서 드려지는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과 무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7).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는 것이 아니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기도 이것이 은밀한 기도이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8). 그 은밀한 기도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입니다.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9-13.참고/눅11:2-4)
주님의기도는 우리말로 번역하다보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지만, 헬라어 원문의 순서로는 ‘아버지’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9).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다가온 것은 박해와 가난과 굶주림이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으로 던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를 드리며, 하늘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는 감동적인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며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그 핍박과 고난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진 핍박 속에 살던 사도 바울이, 당신의 죽음을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때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돌아온 탕자’를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절반이나 탕진한 탕자가 다시 만난 아버지에게 던진 첫마디가 ‘아버지여’였습니다(눅15:21). 그 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버지란 호칭 앞에서 아버지를 버리고 가출했던 아들의 존재가 회복되었고, 단절되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란 호칭이 갖는 위력이요 감동입니다. 우리가 주님의기도를 드리면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마다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은밀한 기도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밀한 기도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영성 1. 은밀히 구제, 은사, 재능, 봉사 등을 행할 때,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영성 2. 은밀한 금식, 무엇보다도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금식하는 것, 금식과 같은 절박함을 갖는 자에게 주님이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삶이 되도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영성 3. 은밀한 기도, 바리새인은 자기가 같이 의로운 자만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였지만, 주님은 세리 같이 통회 자복 회개의 기도, 증언부언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기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감격에 사로잡히는 기도, 이 은밀한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도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 은밀은 하나님 임재를 믿는 것입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졌기에 하나님의 알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네 번째 말씀 구제, 금식, 기도 이 세 가지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갖는 것입니다.
보물:마음에 주인을 모셔라
상수훈 네 번째 말씀은 보물입니다. 주님은 보물에 관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19-20.참고/눅11:34-36;12:22-34;16:13)). 여기서 보물은 문자적으로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예수님은 보물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에게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필요합니까? 그럴리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바라보는 보물이 금은보화, 물질, 경제라는 것입니다. 돈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21). 자기가 보물 같이 여기는 금은보화와 물질과 경제를 땅에 쌓아두는 자는 마음에 땅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이 비유하신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아마도 부자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아서 이 사람은 원래 재산을 많이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농작물을 통하여 부를 측정하지 않았습니까? 물려받은 많은 전답에 곡식들이 영글고 영글어서 해마다 추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눅12:16). 이렇게 원래 재산도 많은 부자가 해마다 농사도 잘되어 소출이 넘쳐나니까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습니까? 이럴 때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심중에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눅12:17). 부자에다가 막히는 것 없이 해마다 소출이 늘고, 부에 부를 더하자, 소문이 자자해지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낸 부자인가 봐” 소리까지 들으며, 부러움을 받자,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마음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자는 어떤 생각에 도달하였습니까?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눅12:18). 먼저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짖자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출이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니 더 크게 지어서 쌓아 놓고 쌓아 놓고 쌓아 놓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무엇 이라고 합니까?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12:19). 부자의 생각은 한마디로 “쌓고 쌓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것입니다. 이 부자의 생각은 본문에 보물을 땅에 쌓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예수 안 믿는 대부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 믿음이 여리거나, 신앙생활의 영적 깊이를 모르는 성도들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자는 어떤 생각까지 합니까?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눅12:19). 이제 부자는 생명의 주인이 자기인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자의 생각을 깨우쳐주시면서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눅12:20).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란’ 본문의 보물을 땅에 쌓는 자입니다(참고/눅12:21).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밤이라도 내 영혼이 갈곳이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하늘에 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쌓으면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하여는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하늘에 쌓는 자에 대하여 주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고 하셨습니다(계2:9). 그러나 땅에 쌓는 자는 하나님께 가난한 자인 것입니다. 좀 재난이, 동록 사고가, 도둑 질병이 찾아와 다 소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재물이라고도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24). 보물, 재물은 단지 돈이 아닙니다. 맘몬니즘입니다 신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감사예물, 주일헌금 등 물질을 뛰어 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어렵습니다.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물질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고 하셨습니다(24). 우리의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물질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물질이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이 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자 권을 ‘가볍게’ 경이 여겨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에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 권을 사모하여 형에게 사기까지 한 야곱은 인간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히 여겼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창25:33-34). 산상수훈의 다섯 번째 말씀 보물은 마음에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물질을 중히 여겨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통칭하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22-23),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게 됩니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어두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이 어두우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의 어둠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주인이면 하나님이 보일 수 없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주인이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은보화, 물질 경제인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도 여러분의 금은보화, 물질, 경제인 보물을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먼저:마음에 신뢰를 가져라
상수훈 여섯 번째 말씀은 먼저입니다. 주님은 25-34절까지 무엇이 먼저인가에 관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그러므로 염려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고 말씀하십니다.
한 구절구절 읽어 내려갈 때마다 주님이 우리의 심정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시는지,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것이지만, 각도를 달리할 때 우리의 염려까지도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 세상 어떤 피조물보다 우리를 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주의 새도 먹이시고 길쌈하지 않아도 백합화를 자라게 하셔서 솔로몬의 영광보다 아름답게 하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것입니다(26-3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너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25,31), 그것은 이방인이 하는 것이요. 너희가 믿는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32).
그러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33).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먼저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신 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여섯 번째 말씀 먼저는 마음에 신뢰를 가지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더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피조물보다 우리를 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는 것으로 주어가 ‘내일’입니다(34). 즉 ‘내일이 되면 너희에게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책임져 주실 터인데, 왜 피조물인 네가 걱정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괴로움이 없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어야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연약함을 내가 확인할 때에만 그분의 강함을 더 신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괴로움이 영원히 존속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날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괴로움을 주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로 끝입니다. 그 다음 날은 내일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염려를 버리고 마음에 신뢰를 가지는 것입니다.
결론
산상수훈 네 번째 말씀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가지는 것입니다. 영성 1. 구제, 금식, 기도의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갖는 것입니다. 영성 1,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 구제, 은사, 재능, 봉사 등 선행을 은밀히 행할 때,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성 2, 금식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금식하는 영혼을 맑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과 같은 절박함을 갖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영성 3,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 바리새인은 자기가 같이 의로운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였지만, 주님은 세리 같이 통회 자복 회개의 기도, 중언부언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기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온몸이 감격에 사로잡히는 기도, 이 은밀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주시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심을 축복합니다.
산상수훈 다섯 번째 말씀 보물은 마음에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신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땅에 쌓다가 좀, 동록, 도둑 같은 사고 재난 질병으로 지출되지 않고, 성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수입으로 쌓여야 합니다. 눈이 어두우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주인입니다. 그러나 눈이 밝으면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도 여러분의 금은보화, 물질, 경제를 다스려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산상수훈 여섯 번째 말씀 먼저는 염려를 버리고 마음에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신 것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영성은 마음에 임재를 갖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영성 1. 구제, 은사, 재능, 봉사 등 선행을 은밀히 행할 때,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게 하옵소서.
영성 2. 금식을 은밀히 행할 때, 영혼이 맑아집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빼앗기지 않게 금식하게 하옵소서. 금식과 같은 절박함을 갖게 하옵소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주님이 내게 항상 거하시고, 일하시고, 이끄시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영성 3. 은밀한 기도. 자기 같이 의로운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 같이 통회 자복 회개의 기도, 중언부언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기도,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만 불러도 온 몸이 감격에 사로잡히는 기도, 이렇게 은밀한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주시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안아주시고, 세워주시고, 이기게 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보물은 마음에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금은보화, 물질, 경제가 신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땅에 쌓다가 좀, 동록, 도둑 같은 사고 재난 질병으로 지출되지 않고, 성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수입으로 쌓이게 하옵소서. 눈을 밝히사 하나님이 다스는 보물이 되게 하옵소서.
먼저는 마음에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염려를 버려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게 되옵소서.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신 것을 내리어 주옵소서.
좁은 문으로 천국 문으로
하나님말씀 : 마태복음 7:6
열매:마음에 영혼을 품으라
산상수훈 일곱 번째 말씀은 열매입니다.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16-20.참고/눅6:43-44,47-49;13:25-27)
‘열매’Fruit에 맺는 과실수果實樹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인데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유익하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16). 이스라엘은 땅도 척박하고 석회질이 많아 지하수를 바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1년에 두 번 열매를 맺는데 다른 과목果木이 많지 않은 이스라엘 땅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서민들이 쉽게 섭취할 수 있는 과일이자 식량입니다(참고/민13:23). 대조적으로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등장합니다(16). ‘가시나무’Thorn,האטד,하-아타드는 키가 1m에서 크게는 3m까지 자랍니다. 이 가지에서 나는 길이 1-2cm 정도의 짧은 가시들은 바늘처럼 예리하고 단단합니다. ‘엉겅퀴’Thistle,חוחן הקנרס,호한 하킨레스는 국화과에 속하기에 국화 모습과 흡사합니다. 다년생인데요. 키가 1.5-2.5m까지 곧게 자랍니다. 경작과 곡물이 자라는데 방해를 합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유해식물有害植物이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유실수有實樹입니다. 영적으로는 나쁨과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그러나 누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인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17).
예수님은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열매를 맺고 사는 가를 보면, 그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에 배경에 대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습니다(15). ‘거짓 선지자’가 ‘양의 옷을 입고’, 선한선지자로 위장을 해서, 결국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와 못된 나무 나쁜 열매를 구분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노략’擄掠,Carry Off입니다(참고/삿5:30;17:3). 사기꾼이 외모가 더 말끔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야 사기를 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그와 같습니다. 제 것이 아닌데, 남의 것을 제 것으로 갈취하는 행위입니다. ‘노략’의 원조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나니’라는 것은 노략을 뜻합니다(벧전5:8.). 거짓선지자 못된 나무는 그 아비 마귀와 같이 노략이 목적입니다(요8:44). 즉 처음에는 선한선지자 좋은 나무로 좋은 것처럼, 가장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1-23.참고/눅6:43-44,47-49;13:25-27)
거짓선지자도 ‘주여 주여’ 예수 이름을 불렀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21). ‘주여 주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그때’에 마지막 때에 예수님은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22-23).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법’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이름으로 수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했지만, 양들을 노략해서 자기 것으로 강탈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이요,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삯군입니다(요10:10-13). 그러면 누가 선한선지자입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1).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40).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아들을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어야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선한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요10:11). 예수를 믿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갈3:19). 선한선지자는 ‘해산’입니다. 거짓선지자는 빼앗는 노략이지만, 선한선지자는 해산입니다. 새생명을 잉태하고 태중에서 모든 것을 아이에게 주고 가장 큰 기쁨인 출산을 얻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산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정성을 다해야 합니까?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선한 선지자입니다.
거짓선지자는 다른 생명을 해치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나무이지만, 선한선지자는 다른 생명을 살리는 포도와 무화과를 내는 좋은나무입니다. 거짓선지자는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한국교회 140년 역사 가운데도 문선명, 박태선, 안상홍, 장길자, 이만희 등 수많은 노략하는 거짓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못된나무도 교회 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편안하게 예배할 때, 오늘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리고, 희생, 헌신, 섬김, 봉사, 찬양, 애찬, 차량으로 수고한 분들에게 마음으로라도, 감사하는 것이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나는 애씀 없이 다른 분의 노고를 누리는 것은, 어쩌면 해를 가하지 않는 노략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희생하시는 분들은 결코 자신의 노력을 다른 이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할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희생으로 다른 성도가 유익을 얻는 것을 보면 기뻐할 것입니다. 한 영혼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희생은 결국 내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선한선지자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봉사 없이 타인의 섬김만을 받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섬김을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냥 대접을 받다가 받기만 하고, 내어 줄줄 모로는 못된 나무가 될까하는 것이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섬길 수 있는 것이 성숙해가는 성도의 모습이고, 그것이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자신은 주지 못하고 받기만 하다가는 자칫 있지 말아야 할 곳인 거짓선지자들이 있는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 선한선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모두 그런 은혜안에 있는 줄 압니다.
좋은 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좋은 것이고, 못된 나무로 나쁜 열매를 맺으면 유감 정도의 사안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에서 ‘불’이 어디인지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19). 그것은 영멸입니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지옥이라니 말입니다. 이것은 열매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히6:8.참고/눅13:6-9). 거짓선지자의 마지막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진다고 하였습니다(계19:20). 주님의 양을 해치는 자의 최후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못된나무 나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쁜 열매와 같은 ‘가라지’와 ‘쭉정이’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3:12,13:30). 나쁜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으면 거지선지자가 가는 똑같은 지옥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는 사람에게는 귀한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는 마음에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첫 번째 열매는 영혼입니다. 영혼의 열매만큼 귀한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 나무 거짓 선지자는 양을 해치고 노략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입니다. 선한선지자로 영혼을 품고 전도를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 바로 영적 해산을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일곱 번째 가르침 열매는 마음에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
간청:마음에 선의를 가져라
산상수훈 여덟 번째 말씀은 간청입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8)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반복은 간청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 각 다른 것이 아니라, 간청의 중요성을 각도와 강조를 달리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간청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후, “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10-11.참고/눅7:9-13).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간청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행 본문에 간청의 또 다른 비유를 해주셨습니다(눅11:5-8). 멀리 사는 벗이 여행 중에 예고 없이 그것도 한밤중에 찾아왔습니다(눅11:5).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이 풍습 가운데 비슷한 것들이 있는데요. 그중의 하나가 손님 대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단 손님이 찾아오면, 자리를 내어드리고, 다과를 대접하지 않습니까? 요즘이야 외식도 자주 하고, 외식하기도 쉽지만, 예전에는 손수 쌀을 씻어 안치고, 급히 장을 보아서, 정성껏 찬을 만들어 대접했지요. 이스라엘도 그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먼 길에서 여행 중 찾아온 벗에게 음식으로 줄 떡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한동네에 사는 절친 집에 찾아가, 잠든 절친을 불러 깨우고는 ‘떡 세 덩이만 꾸어주게’라며 사정을 하는 것입니다(눅11:5-6). 그러나 이 절친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며 단번에 거절을 합니다(눅11:7). 이 말을 들으면 체면을 무릅쓰고 찾아온 친구에게 너무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만, 이렇게 단호히 거절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문은 목재와 철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천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천막을 걷어 올려서 지붕위에 올리고는 내려지지 않도록 돌로 궤여 놓습니다.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를 들기 전 지붕위에 올려져있는 돌덩어리들을 치우고, 천막을 내린 다음 쉽게 열려지지 않도록 돌덩어리들로 눌러놓습니다. 또 방 하나에 모든 식구가 함께 잠을 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보니 식구가 많은 집은 가족들이 서로 어깨가 끼일 정도로 붙어 잠을 자야 합니다. 지금 본문은 이런 상황입니다. 그러니 한 밤중엔 밖에서 누가 찾아오면 여간 번잡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아빠가 일어나면 아이들까지 온 식구가 깨어나야 하고, 천막으로 닫혀 있는 문을 열기 위해서는 눌려 있는 돌덩어리들을 치워야 하고, 천막을 둘둘 말아 지붕 위로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지금 떡 세 덩이를 꾸기 위해 왔는데요. 한 사람이면 한 덩어리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한 덩이도 아니고 두 덩이도 아니고, 세 덩이를 꾸러 온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같이 빵을 부풀릴 때, 사용하는 이스트 효소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루 전에 떡을 세 덩이 정도 만들어 묵혀 둡니다. 밑 떡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하루를 지나면서 발효가 됩니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에 밀가루 반죽을 할 때, 이 밑 떡을 떼어 넣으면, 그것이 떡을 부풀리고 부드럽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집이든 항상 떡 세 덩이 정도는 밑 떡으로 쓰려고 남겨둡니다. 그런데 본문에 절친을 찾아와 떡 세 덩이를 꾸러 왔다는 것은 그 밑 떡도 준비하지 않는 예비성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무람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한 밤중에 떡 세 덩이를 꾸러 온 이 사람을 거절한 절친은 결코 야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다고 하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 달라고 하니 어떻게 합니까? 온 식구가 깨어야 하고, 천막을 말아서 지붕에 올려야하고, 내일 쓸 밑 떡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결국에는 원하는 떡 세 덩이를 주고 맙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말씀합니다(눅11:8). ‘안된다’고 ‘안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눈치가 없는지, 뻔뻔한지, 철면피인지, 조르듯 떡 세 덩이를 꾸어 달라고 하는 그 성화에 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벗됨으로 인하여 주지 아니할지라도 간청함을 인하여 요구대로 주리라’, ‘간청함’입니다.
그런데 이 간청함에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 벗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을 위한 강청입니다. 이것을 타인을 위한 중보로만 적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참고/딤전2:1;엡6:18). 선의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청이 선의이기를 축복합니다. 선의는 하나님의 뜻과도 직결됩니다. 우리는 내가 간청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선의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 이미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서, 공회 종교 심문과 법정 총독의 재판을 받고 매질과 채찍으로 빈사瀕死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치고 상하고 깨어진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한 말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눅23:34). 거반 죽은것과 같은 몸으로 입을 열어 말할 힘도 없는데도,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간청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인 선의를 죽음의 자리에사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산상수훈 여덟째 가르침 간청은 마음에 선의를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청을 비유 하신 후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눅11:9-10). 마음에 하나님의 뜻인 선의를 품은 자의 간청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 빋습니다.
비판:마음에 긍휼을 가져라
산상수훈 아홉 번째 말씀은 비판입니다.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눅6:37-38,41-42).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 비판이란 상대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을 말합니다. 자신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을 금하셨다 해도 책망까지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못할 때면 어김없이 책망합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은 ‘형제의’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로 상처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3). 이것이 비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외식하는 자 대표 격인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십일조를 자랑하기 위해 드리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공격했습니다(눅18:11-12.참고/마23:23;눅11:42).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마5:20). 주님은 우리에게 그들보다 더 나은 의, 곧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의, 나를 죽이고 형제를 높이는 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의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가 아니라, 세상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 ‘거룩한 것’이라는 말은 ‘목걸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목걸이를 개에게 던지지 말라.’에서 개는 애완견이 아니라 사납고 더러운 들개를 말합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개나에게 값비산 목걸이나 귀한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Cast Pearls Before Swine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거룩한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말씀이요, 영생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함부로 던지듯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이름을 마구 모욕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을 영적으로 잘 분별하고 판단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전도하실 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4:23). 천국의 가치를 모르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개와 돼지처럼 물어뜯거나 짓밟고 변을 놓고 뭉개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복음, 거룩한 말씀, 거룩한 예수의 이름을 함부로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비판받아야 할 사람이 없으며, 비판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비판을 싫어합니다. 그렇기 예수님께서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고 하십니다(1). 건전한 비판이라도 사람들은 비판한 사람의 표정과 음성이 자신의 마음에 박히게 됩니다. 비판을 환영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선행되어야 합니다(1-2). 황금률로 불리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와 일맥상통합니다(12).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3-5)
비판하는 사람은 이미 그 자신이 지독한 모순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티’는 헬라어 ‘칼포스’’κἀρφος인데 아주 작은 먼지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충분히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깔끔하게 살아도 농위나 밑에 어떻습니까? 씨꺼먼 모습으로 잔뜩 쌓여 있습니다. 반면에 ‘들보’는 헬라어로 ‘도콘’δοκὀς인데 집을 지을 때 쓰는 굵고 큰 목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극과 극의 비교인데 하찮은 티와 같은 것을 보는 사람은 들보와 같은 죄는 죄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죄는 죄가 아니다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일에 자기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이고 그 다음이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티’ 먼지가 눈에 잘 들어가듯이 눈에 잘 보이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 간음, 살인 등 누구나 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보’란 너무 커서 아예 죄로 생각되지도 않는 너무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있는 죄입니다. 교만이요, 불신앙이며, 외식이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죄요, ‘라가’ 이 돌대가리야 비하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살인까지 이를 수 있는 죄악인 것을 모르는 성경으로 말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죄인 것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23).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7). 우리는 남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평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형제간의 관계는 비판하는 관계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이상 남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 아홉 번째 말씀 비판은 마음에 긍휼을 품는 것입니다.
순종:마음에 생명을 가져라
산상수훈 열 번째 말씀은 순종입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참고/눅6:46-49)
우리는 그동안 산상수훈의 주옥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듣고 끝이 아니고,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24).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모든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잡으러 무리 가운데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린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시면서, 내가 저들을 멸하고자 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나무라신 후,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셨고(마25:52-54), 포박하려는 자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막14:48-49).
예수님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1:23.참고/사7:14).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잡히시기까지 성경의 예언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도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요19:30). 예수님은 이렇게 친히 말씀의 순종에 본을 보이시고, 우리에게 ‘누구든지 이 말 (산상수훈)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하시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라고 하셨습니다(24-25). 순종을 반석이라고 하십니다. ‘주추’柱礎의 문자적 뜻은 기둥 밑에 괴는 돌입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어떤 일의 바탕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석 즉 순종에서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래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문제가 쏟아지고 사고가 나고 환난이 불어와도, 신앙이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내리는데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하였습니다(26-27). 이 사람은 순종이 아닌 방종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듣고 자기에게 맞춰주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오듯이, 문제가 쏟아지고, 사고가 나고, 환난이 불어오면, 순종의 자세가 아닌 멋대로 해버리는 방종의 태도를 보입니다. 말씀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일찍이 놋으로 대를 만들었으니 그가 그 위에 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대하6:13). 여기서 ‘무릎을 꿇고’는 히브리어 ‘바라크’로 복을 뜻합니다. 복은 매 순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 살아가면서 얼마만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 쳤던가를 자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무릎 꿇고 간절히 아뢰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11월 1일부터 다니엘 기도회를 드리고 있는데요. 다니엘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 앞에서도 ‘뜻을 정하여’ 왕궁에서 주는 우상 신전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며 ‘뜻을 정’하였습니다(단1:8). 바사의 다리오가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여, 앞으로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단6:7-10). 이렇게 뜻을 정하여 하나님 말씀 순종한 다니엘이 사자굴에서도 상함받지 않고, 바벨론에 이어 바사 제국에서도 총리 중에 총로 세움 받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너무나도 바빠서 무릎을 꿇을 시간도 없다면, 자기 생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순종이 아닌 방종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께 더욱 무릎을 꿇게 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찬양하며, 엎드리는 것입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14.참고/눅13:24).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선 좁은 길을 걷는 자입니다(13).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14). 좁은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셨습니다(14). 세상의 대중이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택자가 가는 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13). 좁은 문은 생명이고 넓은 문은 멸망입니다. 세상의 대중이 찾는 넓은 문이 아니라, 주님의 택자 앞에 놓인 좁은 문으로 걸어가려면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넓은 문의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왜 너만 어려운 길을 가느냐며 본능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본때 나게 살아봐야 할 것 아니냐는 충동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의 유혹과 본능과 충동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리면 말씀의 순종이 마음을 덮고, 좁은 문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산상수훈 열 번째 말씀 순종은 마음에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은 우리를 좁은 문으로 이끌고, 생명, 구원, 영생에 안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방종은 넓은 문으로 이끌고, 멸망, 음부, 영멸에 떨어지게 합니다. 모든 것을 이루고 가지고 세워도 종국이 멸망이면 안타깝고 불쌍하고 비참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종국이 생명, 구원, 영생이면 가장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첫 마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심령에 새겨야 합니다(3). 천국은 생명, 구원, 영생을 가진 자가 입성하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천국이 가장 큰 복입니다. 말씀의 순종은 마지막까지 간질해야 할 생명을 잃지 않게 합니다. 생명, 구원, 영생을 가진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28-29). 주님의 말씀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열 번째 말씀, 순종은 마음에 생명을 갖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다같이 기도합니다.
산상수훈 일곱 번째 가르침 열매는 마음에 영혼을 품는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못된 나무로 양을 해치고 노략하는 거짓선지자를 물리치게 하옵소서. 좋은 나무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양을 살리는 선한선지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드릴 가장 첫 번째 열매는 영혼입니다. 마음에 영혼을 품고 전도하여 구원받고 영생 얻게 하는 영적 해산을 감당하옵소서.
여덟 번째 가르침 간청은 마음에 선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 한밤중 절친을 찾아가 떡 세 덩이를 구했습니다. 선의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날마다 몸부림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인 선의를 갖고 간청하여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약속을 받게 하옵소서.
아홉 번째 가르침 비판은 마음에 긍휼을 가지는 것입니다. 함께 거룩한 자녀된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 같이 하여, 형제와 함께 세워가게 하옵소서.
열 번째 가르침 순종은 마음에 생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주옥 같은 말씀에 듣고 날마다 무릎을 꿇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말씀 순종으로 넓은 문의 유혹을 이기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천국으로 이르게 하옵소서. 인생의 종국이 천국인 가장 복이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랑하고 중보하는 모든 이들도 말씀에 순종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마음에 천국가는 생명을 가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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