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주일 설교

"기다림"(요21:1-14) 이재현목사(25.08.24)

이재현목사 2025. 8. 24. 16:02

기 다 림

이재현목사

 

하나님말씀 : 요한복음 21:1-14 2025.08.24. 主日禮拜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1)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21:1-14)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여한 성도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인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승리하세요.’

 

디베랴 호수

 

본문에 기록된 디베랴Tiberias,‘지키다호수the shore of Lake Tiberias는 디베랴 바다the Sea of Tiberias로도 불리는데요. 갈리리Galilee,‘반지’,‘’,‘고리호수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21:1).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한 곳인데요. 이 지역의 분봉왕이있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BC20-AD39가 교통과 군사 도시로 건설하고, 로마 황제 디베랴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 Augustus,재위AD 14-37에게 바치면서, 디베랴로 명명,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호수로 불렀습니다. 원래 명칭 갈릴리였던 이 호수는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과 끝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 시작이라 함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 갈릴리 호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부터 3년 전이었죠.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이를 마치고, 그물을 씻는 어부들이 등장합니다(5:1). 그들은 물고기 잡이를 마쳤으나, 빈손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애씀이 결과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루 공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부의 배에 오르신 후,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배 위에서 자신을 따라온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5:1-3).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르신 배의 어부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5:4). 선주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5:5).

 

어부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고, 이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6).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5:7). 예수님을 태운 어부의 배만 아니라, 그의 동업자의 배까지, 가득 채운 물고기로 두 배가 호수에 잠기게 될 정도였습니다(참고/4:21). 이 기적 같은 광경 앞에서 어부는 예수님 앞에 부복했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간청했습니다(5:8). 어부는 앞서 자신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이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 그 옆에서 말씀을 들으며, 놀라운 진리를 깨닫기 시작하였고요. 이에 예수님이 그물을 내리라는 명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고, 자신의 배 한 대로는 감당할 수 없어, 동업자의 배에 도움을 요청해 나누어 실었지만, 두 배가 호수에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목도하고, 자신의 배에 오르신 분은 보통 분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럼으로 그 앞에 부복하고 자신 같은 죄인 감당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 달라고 간청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 어부만의 반응이 아닙니다. 이 배에 동선同船한 그의 형제도 있었고요(4:18). 그의 동업자인 두 명의 또 다른 어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한 이 어부와 같이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9).

 

예수님께서는 놀란 어부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십니다(5:10). 즉 이제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삶,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이 어부와 그의 형제 그리고 동업자인 두 명의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5:11). 병행본문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이들은 배와 그물만을 버려 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은 도왔던 품꾼들 그리고 아버지와 가족들까지도, 버려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4:20-21;1:20).

 

여러분은 이 어부들이 누구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르신 배의 어부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업자는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이 네 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와 기적의 역사를 목도한 제자였습니다. 열 두 제자들 가운데도 베드로는 수제자였고, 요한과 야고보는 그 다음이었을 정도로 사도 가운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변화산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중요한 현장 등에 이 세 사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동행하도록 한 사실이 복음서에는 여러 곳에 증거되어 있습니다.

 

삼 년 후

 

이제 시간은 삼 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예언하신 데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참고/16:21-28,17:22-23,20:17-19;8:31-9:1,30-32,10:32-34;9:22-27,43-45,18:31-3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부활한 자신을 보이시고, 이제 너희들이 사명을 감당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힐까봐 그동안 무서워하며, 숨어 지내던 비밀 아지트에서 뛰쳐나와,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을까요?

 

그들은 오늘 본문에 디베랴 호수로 기록된 갈릴리 호수로 향했습니다. 삼 년 전 자신들이 부름 받은 그 자리에서, 사명을 다짐하기 위해서 일까요? 본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등장인물 들을 보면, 베드로, 도마, 나다니엘, 요한과 야고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두 명까지 포함 모두 7명입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1명 중 4명을 제외하고, 모두 갈릴리 호수로 향했습니다. 열한 명의 제자 가운데, 절반을 훌쩍 넘는 일곱 명이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요?

 

다같이 본문을 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21:3). 아멘! 거기까지 보겠습니다. 언제나 앞장서는 아니 나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베드로가 이번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지금 베드로는 삼 년 전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후, 삼년 내내 예수님의 공생애와 함께 했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잡혀 가실 때, 곤경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으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라 가다가, 대제사장 집의 여종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고 맹세하는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은 갈 엄두조차 못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숨어있던 그에게 친히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부름의 소명과 함께하는 동행과 모른다던 부인과 무서워 숨어 지냈던 은회隱晦와 다시 사신 부활의 감격을 체험하고도, 베드로의 결론은 이전의 어부로 돌아가서 갈릴리에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려면 조용히 혼자 가지,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마치 동요動搖를 일으키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다같이 보겠습니다.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21:2). 베드로만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지요.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어떤 자세입니까? 나중에 책임을 지게 되어도, “나는 베드로가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고 핑계 삼을 것이 있으니, 제자의 사명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들도 여겼던 것이지요. 삼년 전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는 몇 명이 함께 했어요.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 세 명을 포함 네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삼 년 후 갈릴리 호수에는 몇 명이라고요. 7명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던 안드레를 제외하면, 네 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릇된 일에는 전염성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읽습니다.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21:2). 밤새 그물질을 해보았지만, 수고가 헛되었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고기잡이를 하지 않았기에, 실력이 녹슬어서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에 베드로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 년 전입니다. 그날도 밤새 수고를 하였지만, 거둔 것이 없었습니다. 데쟈뷰déjàvu, 이미 기旣, 볼 시視, 느낄 감感, 기시감旣視感이라 할 수 있을 까요? 이전에 똑같은 일을 경험한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깨달아야 했습니다. 삼 년 전도 똑같이 밤새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었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요.

 

다같이 본문을 읽겠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21:4). 이 말씀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밤새 그물질을 할 때, 그 모든 모습을 예수님이 보셨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갈릴리 호수에 계셨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밤새 그물질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언제까지요. 깊은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 동틀 무렵까지, 주님은 제자들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분명 바닷가에 서 계셨는데요. 제자들은 자신들을 지켜보고 계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면, 해변에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삼 년 전과 똑같이 빈 그물에 허망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본문을 봅니다.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21:5-6). 이 상황도 삼년 전과 똑같습니다. 빈손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잡히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대로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명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기록된 사도 요한이 뒤 늦게나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알렸습니다(21:7). 주님을 알아 본 것은 사도 요한이었는데요. 이때도 역시 예수님에게 가장 먼저 달려 간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나서기 베드로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계신 바닷가 쪽으로 노를 젖고 있는 사이, 베드로는 그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고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21:7).

 

그 사이 다른 제자들 오십 칸’, 200 규빗Cubit을 말하는 도량인데요(21:8). 1규빗이 대략 45㎝ 정도이니까, 91m 해변과 거리를 두고, 작은 배로 갈아타고, 물고기가 든 구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오릅니다. 먼저 도착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지금 어떤 장년이 연출되는 거예요. “난감하네, 난감하네!, 아니면 민망하네!, 정적,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십니다(21:12). 제자들은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하였습니다(21“12). 다같이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1:12). 당시 상황에서 예수님 앞에선 제들이 얼마나 주님 앞에 송구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보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고 하였습니다(21:9).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언제부터 갈릴리 호수에 계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 오기 전에 이미 와 계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배에 올라 밤새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오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4절을 통해 동이 틀 무렵 때 오셨다고도 할 수 있으나, 숯을 피우고, 생선과 떡을 구운 시간을 볼 때, 그리고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 오기 전에 이미 와 계셨다고 보아도, 무리한 해석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다시 갈릴리 호수로 오실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밤새 그물질로 고생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 뿐 아니죠. 헛수고한 그들을 위해 친히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이 일을 해서 결과를 얻으면 안 먹어도 배부릅니다. 그러나 죽도록 쌔빠지게”, 뭐가 빠지게요. 舌, 혀가 빠지도록, 너무 힘들어서 혀가 빠질 정도로 헉헉 거리며 일했는데도,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어요. 손에 든 것이 없어요. 그러면 배가 안 고파요, 더 고 파요, 더 고픕니다.

 

이것을 주님이 모르실리 없지요. 그렇기에 제자들이 밤새 소득 없이 그물질할 것을 아시고,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도 극진한 것인데요. 예수님의 손길이 얼마나 더 세심하신지요. 생선을 센 불에 구워야 맛있어요. 약한 불에 천천히 구워야 맛있어요. 예수님은 숯불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자들이 빈손으로 육지에 올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셨습니다. 떡과 함께 따듯한 아침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모르는 아니 따르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이토록 자상하게 정성껏 준비를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준비한 조반을 제자들이 허기에 지쳐 허겁지겁 먹었을까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먹었을 것 같아요. 모르긴 몰라도 후자였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무리에게 끌려가실 때, 다 버리고 도망쳤고요, 그 후 무서워 숨어있는 자신들에게 직접 찾아오신, 부활의 예수님을 보고도, 다시 갈릴리 호수로 떠난 자신들을 위해, 주님이 친히 준비해주신 조반을 먹으며, 울음을 터드렸을 것입니다. 닭 울기 전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아마도 닭 똥 같은 눈물을 흘렸을지 모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맞이하고, 친히 아침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셨습니다.

 

기다림의 영적 의미

 

제자들은 삼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 삼년 후에도,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같은 장소에서 제자들과 만나셨다는 같음이 있지만, 다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삼 년 전에는 주님이 제자들이 있는 갈릴리 호수로 찾아가셨지만, 삼 년 후에는 갈릴리 호수에 먼저 가서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찾자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은 처음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16:15). 이때도 역시 앞장서기 좋아하는 나서기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베드로는 옳은 답을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를 들은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7). 예수님은 베드로의 칭찬하시며, 복이 있다고 하시고,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답변한 것은, 베드로가 이성적으로 깨달아서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한 것은 내 자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하신 분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기 않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이 처음 믿는 순간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예수님은 기다리십니다. 누구를 기다리세요.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세요. 어떻게 기다리세요. 성경을 통해서 그 성경을 증거하는 목사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기다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얼마나 힘을 다하고 계세요?

 

예수님은 부활의 모습을 보고도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그물을 던진 빈손인 제자들에게,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기다리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님의 기쁨이 되도록, 기다리시는 주님을 우리는 마음에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성도 여러분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얼마나 힘을 다하고 계세요.” 이 질문에 어떤 반응을 하게 되세요. 작아지는 나의 모습, 피할 곳을 찾고 싶은 마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 아니면 ! 주님의 뜻을 이루고 나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결의를 같게 되세요. 모두가 후자이기를 축복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는 행복

 

성도 여러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이라고 할 때,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물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이들이라면, 그 기다림이 큰 짐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책임이 버거울 수 있지만, 내 삶의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 다 아시죠.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뿐이리

 

2 고요한 밤 달빛도 창 앞에 흐르면

내 푸른 꿈길도 내 잊지 못하리

저 맑은 바람아 가을이 어디뇨

벌레 우는 곳에 아기 별 눈 뜨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뿐이리

 

올해 추석이 한달 반 정도 남았습니다. 명절에 고향을 찾는 분도 있고, 찾지 못하는 분도 있을 수 있는데요. 명절은 부모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분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가사가 명절이 되면 더욱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세상 어떤 즐거운 곳도 내 가정 내 집에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의 가정, 집이 정말 마냥 즐거운 곳만인가요? 부모에게는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고, 혼사 시켜야 하는 큰 짐이 없습니까? 자식은 연로한 아버지 어머니를 봉양하고, 염려 없게 하고,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 큰 짐이 없습니까? 따지고 보면 가정만큼 나에게 큰 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큰 짐이 아닌 소중함을 가정에서 얻습니다. 나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워준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는 들을 수 없는 엄마, 아빠로 부르는 자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 큰 짐을 나의 부모 나의 자녀의 기다림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큰 짐으로 느끼지만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지금도 두 팔 벌려 저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종국이 하늘나라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신, 예수님이 기다리심을 아는 성도는, 삶의 가치를 알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삶의 가치입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말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

 

성도 여러분은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세요. 우리 모두는 천국에서 예수님을 뵙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은 동일하나, 사모함의 강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다같이 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우리의 장막 집은 저와 여러분의 육체를 말합니다. 이 육체는 기한이 있지 않습니까? ‘무너지면죽음을 맞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사후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천국을 일컫는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느리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누구나 천국이 나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음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함께 읽겠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5:2).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라는 것은 지금 세상에서 삶이 고통스러워서 한숨을 쉬면서 원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는 역설적 표현입니다(11:16). 그런데 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묘사된 천국을 사모하는데,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모함과 간절히 사모함이 같은 사모함이지만 강도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사모라는 말씀에는 그렇지 못한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사모하는데, 그냥 사모하는 자가 되지 말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왜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 뵙기를 사모하는데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까?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종국을 생각하십시다. 나의 마지막은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결론임을 안다면, 그 주님을 뵙기를 사모하는데,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고자, 힘을 다하고, 물러섬 없고, 끝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나를 기다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데에는 첫 번째로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지금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주님도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여러 명 둔 어른은 알 것입니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 엄마 품앗이하려고 아침에 나가서, 해가 질 무렵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하루 종일 일한 엄마를 위해서요, 걸레 빨아서 집안 깨끗이 닦아 놓고, 가마솥에 쌀 씻어 안쳐 놓고, 아궁이에 장작불 피워 밥해놓고, 장독에 가서 된장 퍼다가 된장국 끓이고, 김치 썰고, 밑반찬 놓아, 밥상을 다 차려 놓습니다. 여러 명의 자식 가운데도 그렇게 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똑같이 엄마를 맞아도, 뭐 먹을 거라도 사오나 하고, 엄마 손만 쳐다보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저녁상까지 다 차려 놓는 자식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자식이 더 엄마를 간절히 사모하는지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엄마도 어느 자식이 더 사랑스러운지 자명합니다. 내 배 아파 난 자식도 기대가 더 되는 자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들어 송구할 수 있는데요. 분명한 것은 지금도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주님도 간절히 뵙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나를 기다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데에는, 첫 번째는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다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지금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주님도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정리

 

디베랴 호수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21:1).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BC20-AD39가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을 교통과 군사 도시로 건설하고, 로마 황제 디베랴Tiberius Caesar Augustus,재위AD 14-37에게 바치면서, 디베랴 명명하였습니다. 이곳은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과 끝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본문으로부터 3년 전 물고기 잡이를 마치고, 그물을 씻는 어부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배에 오르신 후,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자신을 따라온 무리를 가르치신 후, 어부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였고, 선주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이후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와서 도와 달라 하니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5:1-7.참고/4:21). 그 자리에서 어부는 주님에게 부복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 달라고 간청했습니다(5:8). 또 다른 어부들도 그와 같이 구하며,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십니다(5:10). 이제 새로운 삶,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에 어부와 그의 형제 그리고 동업자인 두 명의 어부들은 그물과 품꾼들 그리고 아버지와 가족들까지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5:11.참고/4:20-21;1:20). 그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오르신 배의 어부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업자는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이 네 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와 기적의 역사를 목도한 제자였습니다. 열 두 제자들 가운데도 베드로는 수제자였고, 요한과 야고보는 그 다음이었을 정도로 사도 가운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변화산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중요한 현장 등에 이 세 사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동행하도록 한 사실이 복음서에는 여러 곳에 증거되어 있습니다.

 

삼년 후

 

삼 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예언하신 데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참고/16:21-28,17:22-23,20:17-19;8:31-9:1,30-32,10:32-34;9:22-27,43-45,18:31-34).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이시고, 사명을 감당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 증인을 뒤로한 체 디베랴로 향했습니다. 베드로, 도마, 나다니엘, 요한과 야고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두 명까지 포함 모두 7명입니다. 가룟 유다를 빼고 11명 중 4명을 제외하고, 절반을 훌쩍 넘는 일곱 명이 다시 갈릴리로 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요? 언제나 그랬듯이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앞장섰습니다(21:3). 베드로는 삼 년 전 주님의 부름을 받은 후, 삼년 내내 공생애동 안 함께 했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잡혀 가실 때, 곤경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으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뒤따라 가다가, 대제사장 집의 여종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하고 맹세하는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십자가 현장은 갈 엄두조차 못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숨어있던 그에게 친히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이전의 어부로 돌아가서 갈릴리에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려면 혼자 가지, 다른 여섯 명에게 동요動搖를 일으키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며 다르지 않은 결정을 했습니다(21:2). 아마도 그들은 베드로를 핑계 삼아 제자의 사명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소명을 받았을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를 포함 네 명이었는데, 삼년 후에는 7명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던 안드레를 제외하면, 네 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릇된 일에는 전염성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까?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21:2). 베드로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 년 전입니다. 그날도 밤새 수고를 하였지만, 거둔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 상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경각하지 못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밤새 그물질을 할 때, 그 모든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계셨습니다. 깊은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 동틀 무렵까지, 모든 행동을 주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21:4). 이어진 상황도 삼년 전과 똑같이 예수님은 빈손인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히리라고 하셨고, 그 말씀대로 하였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21:5-6). 그러나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명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뒤늦게나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한이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알렸습니다(21:7). 이때도 역시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바다로 뛰어 내려주님께 뛰어갔습니다(21:7). 다른 제자들은 오십 칸’, 91m 해변과 거리를 두고, 작은 배로 갈아타고, 물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오릅니다(21:8).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침묵을 깨시고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십니다(21:12). 제자들은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하였습니다(21:12). 당시 상황에서 예수님 앞에선 제들이 얼마나 송구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21:9).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 오기 전에 이미 와 계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21:1,4).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다시 갈릴리 호수로 오실 것을 아신 것입니다. 사람은 힘을 다해 일하고 손에 든 것이 없으면 배가 더 고픕니다. 이를 모르실리 없는 주님이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도 극진한데 숯불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자들이 빈손으로 육지에 올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셨습니다. 떡과 함께 따듯한 아침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이토록 자상하게 정성을 다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준비한 조반을 제자들이 허기에 지쳐 허겁지겁 먹었을까요? 아마도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조반을 먹으며, 울음을 터드렸을 것입니다. 닭 울기 전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아마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을지 모릅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맞이하고, 친히 아침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셨습니다.

기다림의 영적 의미

 

제자들은 지난 삼 년 전에도, 지금 삼년 후에도,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같은 장소에서 제자들과 만나셨다는 같음이 있지만, 다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삼 년 전에는 주님이 제자들이 있는 갈릴리 호수로 찾아가셨지만, 삼 년 후에는 갈릴리 호수에 먼저 가서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찾자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답했고,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16:15-17).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성이 이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하신 분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기다리신 것과 같이 예수님은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모습을 보고도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그물을 던진 빈손인 제자들에게,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기다리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님의 기쁨이 되도록, 기다리시는 주님을 우리는 마음에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얼마나 힘을 다하고 계세요.” 이 질문에 작아지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나요. 아니면 ! 주님의 뜻을 이루고 나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결의를 같게 되세요. 모두가 후자이기를 축복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는 행복

 

성도 여러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이라고 할 때,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물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이들이라면, 그 기다림이 큰 짐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책임이 버거울 수 있지만, 내 삶의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 어떤 즐거운 곳도 내 가정 내 집에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이 정말 마냥 즐거운 곳만인가요? 부모에게는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고, 혼사 시켜야 하는 큰 짐이 없습니까? 자식은 연로한 아버지 어머니를 봉양하고, 염려 없게 하고,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 큰 짐이 없습니까? 따지고 보면 가정만큼 나에게 큰 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큰 짐이 아닌 소중함을 가정에서 얻습니다. 나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워준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는 들을 수 없는 엄마, 아빠로 부르는 자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 큰 짐을 나의 부모 나의 자녀의 기다림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큰 짐으로 느끼지만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지금도 두 팔 벌려 저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종국이 하늘나라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신, 예수님이 기다리심을 아는 성도는, 삶의 가치를 알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삶의 가치입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말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

 

우리 모두 천국에서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은 동일하나, 강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다같이 봅니다. ‘우리의 장막 집인 육는 기한이 있어 무너지면죽음을 맞이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느리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천국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고후5:1). 이어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는 지금 세상에서 고통스러워서 한숨을 쉬면서 원망한다는 뜻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는 역설적 표현입니다(고후5:2.참고/11:16). 그런데 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인 천국을 사모하는데,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5:2). 사모함과 간절히 사모함은 강도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사모는 그렇지 못한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사모하는데, 그냥 사모하는 자가 되지 말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결론임을 안다면, 그 주님을 뵙기를 사모하는데,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고자, 힘을 다하고, 물러섬 없고, 끝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주님도 간절히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농사를 지을 때, 해 질 무렵 집에 돌아오는 부모를 맞아도, 뭐 먹을 거라도 사오나 하고, 엄마 손만 쳐다보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일한 부모를 위해 저녁상까지 다 차려 놓는 자식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자식이 더 엄마를 간절히 사모하는지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엄마도 어느 자식이 더 사랑스러운지 자명합니다. 내 배 아파 난 자식도 기대가 더 되는 자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주님도 간절히 뵙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최종 정리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목도하고도 다시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한 것, 빈손이 된 것, 다시 명령을 받고 순종했을 때, 그물에 가득 잡힌 물고기 모든 것이 삼년 전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삼년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때는 예수님 찾아 가셨지만, 삼년 후에는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릴리 호수에서의 만남을 영적인 의미를 찾아 설교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신앙을 가질 때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셨기에 내가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믿은 후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경을 증거하는 목사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알기를 기다리십니다. 물론 때로는 강권적으로 주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도록 하실 때가 있지만, 많은 경우 예수님은 한 인격체인 저와 여러분이 깨닫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를 무겁게 할 수 있습니다. 큰 짐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예를 말씀 드렸습니다. 세상 어느 즐거운 곳보다, 가장 즐거운 곳이 가정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고, 혼사시켜야하는 큰 짐이 있습니다. 자식은 연로한 아버지 어머니를 봉양하고, 염려 없게 하고, 편히 모셔야 할 큰 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큰 짐이 아닌 소중함을 가정에서 얻습니다. 나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워준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는 들을 수 없는 엄마, 아빠로 부르는 자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 큰 짐을 나의 부모 나의 자녀의 기다림이 이기는 것입니다.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큰 짐으로 느끼지만 말아야 합니다. 그 분은 지금도 두 팔 벌려, 저 영원한 나라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종국이 하늘나라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신, 예수님의 기다리심을 아는 성도는, 삶의 가치를 알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삶의 가치입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의 종국을 생각합시다. 우리는 지금도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과 만남이 기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위해, 힘을 다하고, 물러섬 없고, 끝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내게 임한 주님의 뜻, 주님의 기쁨, 주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는 성도 여러분이 각 각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사이트Insight를 얻는다면, 제자들은 삼 년 전,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주님의 뜻을 잊고, 다시 갈릴리 호수로 돌아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금도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를 주님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이 간절히 기다리는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주님의 뜻과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영광에 반하는 일에 몰두 할 때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며 기다리심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았습니다. 다시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빈손인 제자들의 모든 모습을 예수님은 깊은 밤에서 동 틀까지 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뒤늦게 자신을 알아 본 제자들에게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맞이하고, 친히 아침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예수님은 당장에 화를 발하시거나, 나무라시거나, 무안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기다리십니다. 여전히 기다리십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우리의 안도와 위안과 안심으로 삼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내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영광이 되어 우리 인생의 종국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성도입니다. 할렐루야!

 

 

결론

 

① 베드로와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사명을 받고 난 후에도, 삼 년전 부름 받기 전에 있었던 갈릴리로 가서 그물을 내렸지만, 삼 년 전과 똑같이 빈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지금 자신들 앞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소명(召命)을 망각하고, 주님의 현현(顯現)을 보지 못하는 어두운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② 예수님은 보지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화를 발하지도 않으시고, 나무라지도 않으시고, 무안하지도 않게 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맞이하고, 친히 아침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주님만을 붙들게 하옵소서.

③ 예수님은 삼 년 전에 제자들이 있는 갈릴리 호수로 찾아가셨지만, 삼 년 후에는 먼저 가서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기다림에 작아지지 않고, 가까이 나가게 하옵소서.

④ 부모로 책임을 감당하고 자녀로 공경하는 것은 큰 짐이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들을 수 없는 엄마, 아빠로 부르는 자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워준 부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가정을 세워가야 하는 큰 짐을, 나의 부모와 자녀의 기다림이 이깁니다. 주님이 뜻을 이루고, 기쁨이 되어, 영광되기 원하는 기다림이 큰 짐이 아니라, 주님이 지금도 두 팔 벌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림이 이기게 하옵소서.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알게 하옵소서.

⑤ 천국에서 나를 기다시는 주님을 뵙기를 사모를 넘어, 간절히 사모할 수 있게 하옵소서.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의 영광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 천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여, 주님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