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 천년설

천년왕국(1) | 개혁주의 전 천년설 핵심주제(10-1) | 이재현목사 | 파루시아 아카데미 | 개혁주의 전 천년설(35)

파루시아 아카데미 2024. 4. 2. 13:54

천년왕국(1)

 

 

Ⅰ 서론

 

천년왕국The Millennium에 대해 영적으로 초림과 재림 사이라고 보면 무 천년설A-millenarianism이 되고, 복음의 증대를 통한 평화를 견지하면 후 천년설The Post millennial View이 되며, 재림 후 도래할 실제적 관점을 가지면 전 천년설The Pre-millennial View이 된다. 이 가운데 전 천년설은 역사적 전 천년설Historic Pre-millenarianism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arianism로 나눈다. 이렇게 천년왕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종말계시 전체가 좌우된다(저자는 역사적 전 천년설을 더 세부적으로 세대주의 전 천년설, 상징적 전 천년설Symbolic Pre-millenarianism, 개혁주의 전 천년설Reformism Pre-millenarianism로 구별한다.).

 

이 가운데 개혁신학에서 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은 제외하고라도, 무천년설은 시대적 관심도 종말적 징조도 찾을 필요가 없다. 영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전 천년설을 지지한다면 경각하고 신부로 단장하는데 전력하게 될 것이다. 재림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경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해석 하나의 차이가 아니라 교회사 전체와 성도 개개인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9:24).1)이 증언이 2천 년 전 오신 주님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지금 세상에 죄악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장망성將亡城,the City of Destruction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상적인 세계를 묘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히 실현될 예언이다. 다음 아닌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세우실 천년왕국의 성취인 것이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4:18-19,참고/61:1). 이 구절 역시 초림의 주님에 의해 성취되었는가? 지금 모든 사람이 자유를 얻고 질병의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수많은 사람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성경은 소설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 역시 재림의 주님이 통치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사탄을 무저갱에 던져 넣고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7천 년이 차매 그 옥에서 놓여이 사이의 천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종말론의 요체이면서 난제이다(20:3,7). 이 논란은 기독교역사 2천년 동안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본론에서 그 해답을 찾아가도록 한다.

 

 

 

Ⅱ 본론

 

1. 천년왕국을 영적 해석으로 보는 견해와 반론

 

(1) 천년왕국을 영적 해석으로 보는 견해

 

① 국내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

 

무천년론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을 문자적인 천년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긴 기간의 상징으로 보며, 왕노릇 한다는 것은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복음 전파 행위와 그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것이므로 천년이라고 하는 기간의 제약을 받을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사탄이 결박되었으므로 전 신약 시대는 모든 성도들(영적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2)

 

천년동안은 … 신약시대의 은혜의 기간 전체를 말하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신 기간이다.…천년동안 악의 대장인 사탄을 결박하는 것은 기독교 시대의 구원 받은 자들이 문제없이 선교 활동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의 배려이다 주님의 설명은 사탄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년 동안 결박한 것이다. 사탄이 이 땅에서 마음껏 활동하면 성도가 정상적인 생활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3)

 

전 천년설에 의하면 구속역사에서 현재라는 시점에서 볼 때 미래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년왕국과 심판과 영원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 중에 신약성경에 재림과 부활과 심판과 영원 상태는 여러 번 반복해서 예언되었으나, 천년왕국(전천년설이 말하는 지상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계시록 20:1-6에 밖에 없다는 것이 여전히 전천년설의 문제점이다.4)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목표는 모든 백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백성 가운데 충만히 거주하시며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위해 천년왕국을 세우는 일은 성립할 수 없다. 2 바룩서(2 Baruch)4 에스라서(4 Ezra)에 의존해서 2세기 중엽부터 교회에 천년왕국 사상이 크게 일어났지만, 3세기부터 교회는 그 사상을 배격하였다. 성경과 신경들이 천년왕국을 지지하지 않는다. 20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도들이 부활하여 천년왕국의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 살아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5)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어 천년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인데6)

 

이 세상에서 천년왕국이 있고 그 후에 영원한 천국생활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바로 천국생활로 들어가게 되든지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천년왕국에 가까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7)

 

상기에 인용된 견해를 통해 무천년주의를 표방하는 한국교회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천년왕국에 대한 생각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② 국외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

 

요한계시록 2010, 14, 15절에 언급된 불 못이 최후 형벌의 장소를 상징하기 때문에 1절과 3절에 언급된 무저갱은 최후의 형벌의 장소가 아니어야 한다고 하며 이 장소들은 사탄의 활동이 천년기 동안 약화될 것을 뜻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8)

 

마귀가 모든 의미에서 결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되풀이한다. 그의 영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탄이 그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허락된 영역에서는 더욱더 극심하게 날뛰고 있다. 한 마리의 개가 굵고 긴 쇠사슬에 묶여 있으며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감금된 행동 반경 안에서는 매우 사납고 큰 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그 개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범위 밖에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하여 어느 누구도 물지 못한다.9)

 

그 외에도 벌콥Louis Berkhof,1874-1957요한계시록 204-6이 구절들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이 지상에서 통치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암시들이 결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계시록 44절과 69절 같은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그 장면은 하늘에 놓여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고 하였다.”10) 보쿰Richard J. Bauckham,1946-다니엘서 79절의 신적 보좌 환상을 계시록 204절의 보좌와 연결시켜 성도들, 특별히 순교자들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주장한다.”11) Gregory K. Beale,1949-“‘사탄의 결박과 결과로 무저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루던 앞선 내용에 이어 204절부터는 하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묘사하는 장면 전환이 있다.’고 해석한다.”12)

 

(2) 천년왕국을 영적 해석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반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마귀를 결박했으며 무저갱에 던져 잠갔고 그 위에 인봉까지 했다고 한다(20:2-3). 그런데 이를 사람이 개를 끈으로 묶은 것에 비유하다니 이것이 과연 적합한 해석인가? 또 하나님께서 친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어떻게 마귀가 움직일 수 있는 감금된 행동반경이 있다고 하고, 그 안에서는 매우 사납고 큰 해를 입힐 수 있다고 하는가? 도무지 성경에 기록된 의도와 강조점과는 무관한 해석이 아닌가? 이러한 헨드릭슨의 해석은 어떻게든 무천년주의 종말론 틀에 천년왕국 본문을 억지라고 끼워 맞추려는 무리한 시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철저하게 결박당했다고 하면서 재림의 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를 인정하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 편의 철저한 결박과 통제가 실제로는 철저하지 못했거나, 마귀 편의 능력이 하나님의 결박과 통제를 무시할 만큼 강력했다는 뜻이다.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중 어떠한 것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13)

 

민병석 목사도 이 견해에 지지하고 있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여기(20:2-3) 나오는 천년을 교회시대로 본다. 용을 잡아서 무저갱에 던져 넣은 기간을 천년으로 잡는다. 이 기간이 교회시대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천년동안은 사탄을 무저갱에 던져 넣는다는 이론이다. 그 이유가 너무나 희한稀罕하다. 사탄을 무저갱에 던져 넣는 사건을 교회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방해를 주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행동의 제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무서운 감옥인 무저갱에 결박하여 감금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 감금한 모양이 사탄의 행동을 제한하는 상태로 보이지 않는다. ‘큰 쇠사슬로 결박하여 천년이 차도록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무저갱에 던져 넣는다고 했다. 이 본문은 사탄의 활동을 한정시킨 표현이 결코 아니다. 과연 이 표현이 사탄이 복음의 전파를 위해 행동을 제약한다는 조치로 보아야 하는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무저갱에 던져 넣었다면 세상에는 사탄의 미혹이 없어야 한다. 복음전파에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로워야 했다. 그렇다면 교회사에 나오는 그 수많은 순교자들은 어떻게 등장했는가? 사탄에 의해 자행된 교회의 박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14)

 

정성욱 박사는 무 천년설의 허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천년주의의 약점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을 본문의 요구를 따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그 논리적 흐름을 따라가게 되면 천년왕국이 예수님의 재림과 백보좌심판 사이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마귀가 결박되었고, 제한된 영역에서만 움직인다는 무천년주의 견해도 성경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20:1-3을 보면 마귀의 결박은 완전한 결박이기에 작고 제한된 영역에서조차 그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마귀는 여전히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고(벧전5:8)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여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15)

 

박형룡박사와 박윤선박사는 무천년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영해의 과도. 무천년기 재림론이 계시록 201-6절의 명백한 진술을 영해하고 지상 천년기의 실재성을 부정하려는데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논법이 많이 포함되니 동의하기 곤란하다. 즉 명확한 년 수 천년 간을 완전한 시기로 보고 마는 것은 견강부회의 억설로 보인다.16)

 

계시록의 기록대로 사단의 사역들은, 역사적 진행성(進行性)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무천년주의자들은, 그것들을 진행으로 보지 않고 모두 다 한 가지 사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사단은 성도 참소의 자리에서 떨어지고, 신약의 복음 운동이 승리함)이 여러번 강조된 것으로만 본다. 이것은 잘못이다. 계시록의 기록 내용은, 분명히 사단의 사역들을 진행성 있게 말한다.17)

 

무천년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1837-1920는 요한계시록 1911-21절을 신약시대의 복음 전도 운동으로 보는 무천년주의자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재림 광경을 보여준다고 해석하여 실상은 역사적 전 천년설에 동조하고 있다.18) 202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에 관해서도 카이퍼는 이 시대가 재림 후에 올 것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행동의 진행에 관계된 과도기를 말함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시간 관념보다 하나님의 시간 관념으로 말한 것이다. 이 기간 큰 결론적 사건에 이르는 중간 계단이라라고 하였다.19)

 

이것은 무천년주의자들도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백마와 그것을 탄 자’(19:11), ‘사탄 천년 결박등 일부분들을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20:2). 그러나 문제는 다른 부분들은 초림 혹은 초대교회로 해석함으로서 요한계시록 해석에 일관성이 결여된 큰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20)

 

박윤선 박사는 요한계시록 191-3절을 무천년설에서는 그리스도 초림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활동이 어느 정도 제한될 사실을 가리킨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것은 재림 이후에 있을 일이다.”4-6절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뒤에 땅 위에서 되어 질 일들에 대하여 기록되었다.”고 해석하였다.21)

 

어느 학자는 역사적 전 천년설주의자로서 천년왕국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도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기도 한다.

 

20(천년왕국)의 어느 해석을 취하든 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과거에 하던 방식과는 달리,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보다. ‘택하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무천년을 사랑하는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들의 입장에 서기를 원한다. 아니면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무천년주의의 입장에 서도 좋다.22)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한국의 가장 전통 있는 신학대학원에서 그나마 역사적 전 천년주의를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교수 중 한 분이 한 이 말은 결국 무천년주의 즉 영적해석화로 볼 수밖에 없다.

 

앞에 소개된 한 무천년주의자는 성경 한 곳에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적 천년왕국을 인정할 수 없다 말한다. 중요계시는 반드시 반복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성경에서 목사라는 칭호는 에베소서 411절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만 있는 직분을 부정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용어는 한 곳에 기록되었지만 성경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같은 사역을 뜻하는 구절들을 찾아 정립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이에 대한 실례를 더 든다면 요한계시록 등장하는 교회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을 보면 더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교회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 7흰옷 입은 무리’. 12해를 옷 입은 여자’, 14곡식’. 15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에 선 무리’, 19어린양의 신부’. 이렇게 교회한 가지를 말하면서도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다.23)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미가서 52절 말씀대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탄생 장소에 대해 이곳 한군데에만 예언되어 있다고 베들레헴을 실제Reality 지명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천년왕국이 교회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대한데 부인하려드는가? 그런데도 이것을 왜 묻어 두려하는지 목회자들은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尾註>

 

1)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서는 이 구절을 재림이후 이 세상에 세워질 천년왕국에서의 성취로 본다. 하나님이 정하신 인류 역사 70이레가 마친 후 메시아왕국에서 유대인들이 받을 복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 본문을 2000여 년 전 성육신하신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한다. 이 구절이 과연 초림에 있었던 일인가?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이것은 유대인의 남은 자들의 구원으로 이 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해 준다. 그때 그들(유대인)의 죄가 완전히 사함 받게 된다(11:27).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율법과 의를 좇던 그들에게 비로소 그리스도의 의가 주어진다.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메시아로 말미암은 천년왕국의 도래를 예언했던 선지자들의 환상과 예언이 성취하게 된다.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의 왕으로 그 나라를 다스리시게 된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초림에 이루어진 것 이라면 지금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가? 이에 대한 무 천년설의 답변은 영적인 것이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다니엘 924절은 예수 재림 후 이 세상이 심판 받아 멸망한 후 새롭게 조성된 천년왕국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완결하는 에덴의 회복과 함께 이루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완성 영적으로도 완전히 회복된 성도들의 삶, 타락 이전 아담이 영위한 것과 동일한 말씀인 것이다.

 

2) 석원태, 『기독교7영리』, 서울:도서출판 경향, 2000.12.5. p.404.

 

3) 강신권, 김형종, 『읽기만 해도 열리는 요한계시록』, 서울:솔로몬, 2009.7.31. p.267.

 

4) 권성수, 『요한계시록』, 서울:도서출판 횃불, 1999. p.704.

 

5) 서철원, 『서철원박사교의신학전집Ⅶ』, 「종말론」, 서울:쿰란출판사, 2018.4.30. p.29.

 

6)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성서유니온선교회 2003. p.219.

 

7) 김서택, 『역사의드라마요한계시록,, 서울:성서유니온선교회, 2004.8.20. p.802.

 

8) Anthony Andrew Hoekema, 류호준역, 『개혁주의종말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6.1. p.307-311.

 

9) William Hendrriksen, 오성종역, 『내세론』, 새순출판사, 1991.9.10. p.232.

 

10)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조직신학 상하 합본』, 권수경, 이상원역, 기독교문사, 1999.2.25. p.118.

 

11) Richard. J. Bauckham, 『요한계시록의 신학(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이필찬역, 서울:한들 출판사, 2006.8.30. p.115.

 

12)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Eerdmans,1999). p.995. / 397-399. 이광복, 『역사적 전천년주의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서울:도서출판 흰돌, 2012.5.30.p.141 재인용.

 

13) 이광복, 『역사적 전천년주의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무 천년설에 대한 비평적 평가」, 서울:도서출판 흰돌, 2012.5.30. p.129 요약.

 

14) 민병석, 『개혁주의 전 천년설』, 도서출판 신생, 2016. 9. 2. pp.112-113.

 

15) 정성욱, 『정성욱교수의 밝고 행복한 종말론』, ()눈출판그룹, 2016.3.7., p.39.

 

16) 박형룡, 『박형룡박사저작전집Ⅶ 교의신학 내세론』, 서울: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7. p.235-236.

 

17) 박윤선, 『성경주석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영음사, 2011.5.2. p.333.

 

18) Abraham Kuyper, Revelation of St. John, 1964. p.286. 박윤선, 『성경주석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영음사, 2011.5.2. p.335. 재인용.

 

19) Ibid. p.329.

 

20) 개혁주의 전 천년설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철저히 종말에 있을 사건의 기록으로 본다.

 

21) Abraham Kuyper, Revelation of St. John, 1964. p.286. 박윤선, 『성경주석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영음사, 2011.5.2. pp.329-330. 재인용.

 

22) 김길성, 『개혁주의 종말론』, 경기: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2007.

 

23) 이광복, 『알기 쉬운 계시록』, 서울:도서출판흰돌, 2012.1.1. p.25.